[진료철학] 의무기록의 이면 : 실종된 POMR과 SOAP의 한계 | 구로디지털단지 한의원

2025. 12. 15. 09:00원장 소개

 

1. 의학이 과학으로 거듭나려면?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의학은 과학적이다'라고 믿습니다만,

사실 의학은 그 자체가 과학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과학적이어야만 하는 기술체계'에 더 가깝습니다.

 

현대의학이 과학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까닭은,

여러 기초과학의 발전의 도움도 컸지만

수학이 도입되면서 '의학통계'가 자리잡은 것이 가장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대에 선포된 '근거중심의학'이 비로서 의학을 과학으로 만든 것이죠[각주:1].

 

2. 기억과 직관의 한계를 넘는 '문제지향의무기록'의 혁신

 

한편 임상에서의 구체적인 의사의 판단을 '과학'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매 임상적 결정을 되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는 '의무기록'이라는 형태로 드러나지요.

이 영역에 있어서는,

1960년대에 로렌스 위드 박사 (Lawrence Weed, 1923~2017) 가 주장한

'문제 지향식 의무기록(POMR)'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의사의 진료과정을 과학적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환자의 여러 문제를 전체적으로 누락없이 파악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는 유용한 도구입니다.

 

1960년대 이전,

의무기록방식은 '원천지향 의무기록(SOMR)'이었습니다.

의사는 의사대로,

간호사는 간호사대로,

검사 결과는 검사결과대로 각각 기록되는 구조입니다.

이는 행정적으로는 편리하지만 여러 정보가 파편화 되어있어서,

의사는 기억과 직관에 의존하는 판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로렌스 위드는

  1. 기초 자료 (The Database)
  2. 문제 목록 (The Master Problem List)
  3. 초기 계획 (Initial Plans)
  4. 경과 기록 (Progress Notes)과 SOAP

을 중심으로 '문제지향의무기록'을 고안,

흩어진 정보를 통합적으로 다루는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3. 한국 의료의 문제

 

하지만 한국에서는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과학적 기록'방식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경과기록의 SOAP만 사용되고 있을 뿐이죠.

그 결과 환자의 전반적인 '문제목록'은 잊혀지고,

환자의 정보는 누락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과학적이어야 하는 의학'이,

'합리적 기록방식'을 버림으로써 '기억과 직관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퇴보한 것이죠[각주:2] .

 

4. SOAP 양식에 내재된 오만

 

또 사실 저는 이 SOAP라는 양식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습니다.

  • S (Subjective): 주관적 정보 (환자의 증상 호소)
  • O (Objective): 객관적 정보 (검사 수치, 의사의 관찰)
  • A (Assessment): 평가 및 진단
  • P (Plan): 치료 계획

SOAP는 환자의 구체적 문제를 위와 같은 방식으로 정리하는 것인데요,

사실 의료현장에서 '주관적 정보'와 '객관적 정보'의 구분은 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환자의 호소는 아무리 객관적인 호소라도 '주관적 호소'라고 정리됩니다.

의사의 관찰은 의사의 주관에 따라 판정이 달라지는 것은 분명 '주관적'일 텐데,

오히려 '객관적'이라고 정리됩니다[각주:3].

여기서 의사의 오만이 발생하게 되는데요,

환자의 호소는 아무리 진정성이 있어도 '주관적 느낌'에 불과하고,

의사의 판단은 아무리 주관적 견해여도 '객관적 판정'이 되고 맙니다.

환자의 '증상(symptom)'은 의사의 손이 닿아야 비로서 사실(fact)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죠.

이는 과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각주:4].

60년대에 이미 환자의 입장을 깊이 고뇌한 로렌스 위드 박사도 놓친,

미묘한 언어의 문제이겠지요.

 

5. 개인적인 단상

 

저는 개원의로써, 

'문제목록을 공유'한다는 원래의 POMR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지만[각주:5],

나름 환자를 파악하기 위한 '문제목록'에 유의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SOAP에 있어서는.

S야 말로 진정한 문제이고,

O는 오히려 시대적 상황적 한계에 갇힌 외부자의 관찰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각종 검사 수치가 가지는 장점도 명백하지만,

그것은 '객관적 사실'이 되기 위해 환자의 진실을 단순화 시킨 자료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1. '근거중심의학(EBM)'이라는 용어는1990년 고든 가이엇(Gordon Guyatt)이 처음 사용했고, 1992년 JAMA 논문으로 공식화되었습니다. 이후1994년,  '코크란 연합(Cochrane Collaboration)'이 출범하고 1996년 BM에서 EBM의 정의가 명확히 성숙하게 됩니다 [본문으로]
  2. 수련의때 모 양방 대학병원에서 경희의료원으로 이송된 환자가 있었는데, 환자가 의식이 분명하지 못했습니다. 가지고 온 영상소견 보면 결코 그럴 만한 환자가 아닌데 이상하다 싶어서 확인해 보니, 혈당이 너무 높은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의무기록을 보니, 해당 양방 대학병원 응급실에 처음 방문시 이미 혈당이 200이 넘었는데, 이후 아무런 혈당검사나 관련 조치가 없었더군요. 그래서 보호자에게 물어보니, 원래 당뇨병 환자인데 입원시 약을 다 수거해가서 당뇨약을 못먹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혈당을 체크하지 않고 약도 못먹게 하니, 환자가 그렇게 된 것이죠. 만약 제대로된 문제목록이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게 지방의 중소 병원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병원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알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3. 가령 환자가 '피가 나요'라고 하면, 출혈이라는 사실은 의사가 아니어도 인지할 수 있지만 'O'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반면 의사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는 모호한 압통이나 청진시의 애매한 잡음은 재현성이 아무리 낮아도 'S'에 기록될 수 없고 'O'에 기록됩니다 [본문으로]
  4. 사실 저는 이것 때문에 처음 SOAP배울 때 되게 힘들었어요. 아니 도대체 뭐가 주관적이고 뭐가 객관적이라는 것인지? 심지어 환자 나이를 'S'에 적어 놓고 잘된 차팅이라는데, 아니 환자의 나이가 주관적인가요? 그게 주관적이면 MRI판독은 예술의 영역이죠. '주관과 객과'이라는 용어를 잊고 그냥 '기호'로 취급하고서야 제대로 차팅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으로]
  5. 차트회사에 문의하고 요구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청구'와 관려된 핵심기능이 아니다 보니, 소외받는 거 같습니다. [본문으로]